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1세 (문단 편집) ===== 포로 학살, 1191년 ===== 한편 아크레를 점령함으로 리처드는 무슬림 병사 2700명을 포로로 잡게 되는데 이 포로의 처우에 대해 살라딘과 협상을 시작했다. 원래는 [[성십자가]]와 포로의 몸값과 그리스도교 포로 1500명을 교환하기로 합의했고 기한은 한 달로 정했다. 그런데 살라딘은 몸값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기한이 지나도록 저 협의를 지키지 못했다.[*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.] 대신 살라딘은 일단 포로들의 몸값의 일부분만 지불하겠고 나중에 마저 지불하겠다고 재협상을 했는데, 리처드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기독교 포로들을 풀어준다는 확약을 요구하였고 동시에 중요한 기독교 포로들의 명단을 제출해줄 것을 요청했다. 살라딘이 이 요청을 거절하면서 다시 재협상에 들어가자 살라딘이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결국 포로들을 학살했다(1191년 8월 20일). 이 학살은 아크레에서 몇 km 떨어진 언덕에서 일부러 살라딘의 군대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진행했다고 한다. 이 참상을 지켜보던 이슬람 군대는 이곳으로 돌격해왔으나 십자군은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.[*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[[포로 학살]] 맞지만, 이유없는 학살조차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던 중세의 전쟁에서 합의가 지켜지지 않아 처형했다는 것은 당시 전쟁 양상으로 보았을 때 특별히 잔인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. 때문에 이 사건을 두고 살라딘도 리처드를 비난하거나 경멸하지는 않았다. 왜냐면 이슬람 측도 포로 학살을 흔하게 했으니까.] [[하틴 전투]]가 끝난 이후 포로로 잡힌 [[성전기사단]]과 [[구호기사단]]의 기사 230명이 살라딘의 명령으로 학살당했다.[* 성전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제라르 드 리드포드만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형을 면하고 풀려났다가 아크레 공성전에서 죽는다.][* 보병의 수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는지 기록이 없는데 병력 구성상 말탄 기사가 230명이나 포로로 잡혔으면 말 없는 보병은 그 10배 이상 잡혔다고 봐야 한다. 이들 중 기독교로 개종한 투르크 용병은 모두 죽였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으니 리처드가 학살한 3천 명과 별 차이 없다. 그럼에도 기독교 측에서조차 이를 두고 조금도 비난하지 않은 이유는 이교도 포로를 학살하는 것은 당시 관점에서 전혀 잔인한 행동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